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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난의 시대에 던지는 질문

비난의 시대에 던지는 질문

다시 선거의 계절이 돌아왔다. 휴대전화는 쉴 새 없이 울려대고, 그 속에는 타인을 향한 날 선 공격과 자신을 향한 과도한 미화가 뒤섞인 메시지들이 가득하다.

흥미로운 점은 같은 메시지를 두고도 지지 여부에 따라 반응이 극명하게 갈린다는 것이다. 내가 지지하는 이의 허물은 ‘그럴 수 있는 일’이 되고, 상대의 작은 실수는 ‘용서할 수 없는 죄’가 된다. 비단 정치권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100만, 200만 구독자를 거느린 유튜버들은 타인의 과거를 파내어 ‘검증’이라는 이름의 심판대에 올리고, 대중은 그 위에서 소위 ‘멍석말이’라 불리는 집단적 저주를 퍼붓는다.

이 거대한 비난의 소용돌이 속에서 문득 자문하게 된다. 과연 우리 중 과거의 행적과 언행으로부터 자유로운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타인에게 돌을 던지는 이들 또한 한때는 ‘올챙이’였음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어두운 과거는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가.

용서와 회개, 사과라는 단어는 어느덧 구시대의 유물이 되어버렸고, 세상은 오직 ‘죽여야 사는’ 저주의 언어로 가득 차 있다.

이 삭막한 풍경 위로 성경 여호수아 8장의 한 장면을 겹쳐 본다. 이스라엘 백성이 아이 성 점령이라는 승리를 거둔 직후의 일이다. 보통의 지도자라면 기세를 몰아 다음 전쟁을 준비했겠지만, 여호수아는 멈춰 섰다. 그리고 에발 산에 제단을 쌓았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제단을 쌓은 장소다.

성경에서 축복을 상징하는 산은 ‘그리심’이고, 저주를 상징하는 산은 ‘에발’이다.

상식대로라면 당연히 축복의 산인 그리심에 제단을 쌓아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저주의 산인 에발에 단을 쌓으라고 명하신다.

이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저주가 선포되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제사를 통해 용서와 회복의 길을 열어주셨다.

즉, 인간의 저주가 끝나는 지점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에발 산의 제단은 훗날 저주의 상징이었던 나무 틀 위에서 온 인류를 구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닮아 있다.

우리가 죄의 저주 아래 갇혀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는 대신 그 저주의 한복판으로 찾아오셨다.

여호수아는 그 제단을 쌓을 때 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자연석’을 사용했다.

이는 인간의 기술이나 공로, 혹은 화려한 정치적 수사(修辭)가 아니라 오직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구해야 함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그 돌 위에 율법을 새겼다.

바람에 날리는 흙이나 썩어 없어질 나무가 아니라,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돌에 기준을 새긴 것이다.

상황과 이익에 따라 고무줄처럼 변하는 세상의 잣대가 아니라, 변치 않는 절대적 가치를 삶의 기준으로 삼으라는 준엄한 가르침이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유튜브와 미디어의 홍수 속에서 세상이 바뀌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수 십만 건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화려한 언설은 많지만, 그 말씀을 자신의 마음에 ‘각인’하는 이들이 적기 때문일 것이다.

남을 정죄하는 도구로 말씀을 사용하는 이는 많으나, 자신을 비추는 거울로 삼는 이는 드물다.

결국 축복과 저주는 감정이나 운명이 아니라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남을 저주하며 사는 인생에 복이 깃들 자리는 없다. 타인을 향해 쏟아낸 저주는 부메랑이 되어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온다.

반면, 저주 받아 마땅한 자리에서도 축복의 언어를 선택하는 이들은 세상을 살리는 통로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것은 타인의 과거를 파내는 삽이 아니라, 저주의 산 위에 회복의 제단을 쌓는 용기다.

비난의 돌을 던지기 전, 내가 서 있는 곳이 에발 산임을 자각하고 그곳에 은혜의 제단을 쌓아야 한다.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그러면 너희가 살리라”는 오래된 외침은, 혐오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한 유일한 생명줄이다.

2026년 3월 12일 오전 7:02by 남대진